재균형: 변화한 세계와 가지 않은 길
2018년 발생한 미중 무역분쟁은 지난 40년간 유지되었던 세계 경제 패러다임을 크게 바꾼 역사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방중(訪中)을 계기로 미국과 정식 수교했고, 이후 1979년 덩샤오핑이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주창하며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다.
이후 중국과 미국은 상당 기간 경제적 협력 관계였으며 미국이 소비하고 중국이 생산하는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국력이 날로 신장하며 파트너는 경쟁자로 바뀌었고,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글로벌 불균형 체제를 새로운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린스펀 의장이 언급한 '장기금리 수수께끼'는 중국의 막대한 무역흑자가 미국 국채에 재투자되면서 금리를 끌어내렸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강력한 공급자의 힘이 약화되면서, 전세계 공급망은 다극화되고 분절될 가능성이 커졌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강제적 형태의 재균형, 즉 미국채 금리 급등과 중국 경제의 시스템 리스크이겠으나 우리는 극단적 가정을 배제하고 변화한 세계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이 어떻게 재정의될 것인지에 집중하려 한다.
위기는 대응을 낳고, 정책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9년 한국 기업의 역할은 어떻게 재정의될 것인가.
첫째,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구조조정은 강화되고 중간재 공급 벤더로서의 한국기업 역할도 줄어들 것이다.
지금까지는 중국 익스포저가 큰 기업들이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정반대일 수도 있다.
둘째, 그러나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 격화로 어려움을 겪었던 기업들은 오히려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추격이 약화된 업종에서 한국 기업들은 자유도가 높아져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중국의 시장 개방과 내수 확대 전략에 부응할 수 있는 기업들도 기회 요인이 커진다.
셋째, 대한민국의 새로운 경제모델을 모색하는 가운데 대북 경협은 필수불가결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2020년 4월 총선이 있다.
정치적으로 찬반이 극심하나 인구 보너스 효과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등을 감안하면 경협은 여전히 매력적인 카드다.
중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수교를 택했듯, 북한은 미국이 필요하고 미국은 북한이 필요하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외교적 지렛대를 계속 이용하려 할 것이다.
2019년 한국 기업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미중 관계의 현격한 개선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이고 중앙은행의 통화긴축으로 인한 채권시장 혼란도 지속될 것 같다.
그러나 가정이 바뀌면 결과가 바뀌고, 판이 바뀔 때 최고의 투자 기회가 나온다.
실질금리와 주식시장: 과거 사례와 주가 저점
주식시장이 2년 전 가격으로 회귀하면서 본격적인 하락세가 시작된 것인지 우려하는 시각들이 많다.
자산가격을 결정하는 제1 변수인 채권금리가 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졌고, 미중 무역분쟁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전망은 훨씬 조심스러워진다. 제반 환경이 취약하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증시는 급등락을 경험한다.
특히 수 년간 낮게 유지되며 금융시장의 안정에 도움을 주었던 실질금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실질금리가 상승한다는 것은 임금 상승으로 인한 소비 증가분, 자산가격 상승으로 인한 부의 효과보다 금리가 더 올라간다는 의미다.
2000년 이후 실질금리가 올라가는 구간에서 시장은 어떤 형태로든 홍역을 치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과 2013년인데, 2008년은 금융위기 결과물로 실질금리가 올라간 것이라 지금과는 다르다.
그러나 2013년은 연준의 갑작스런 테이퍼링 중단 선언 등 통화긴축이 주요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최근 연준은 미중 무역분쟁으로 경기둔화 우려가 거세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립금리 이상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때문에 2019년 주식시장 방향성은 채권시장에 달려있다고 본다.
상황은 녹록하진 않다.
2018년은 미국 중앙은행의 긴축 기조 전환이 시장을 뒤흔들었지만 2019년은 ECB가 채권 매입을 마무리 짓고 8년 만에 처음으로 금리인상에 나서는 해다.
공교롭게도 유로존 경제 회복의 주역이었던 드라기 ECB 총재가 2019년 10월 임기 만료된다.
드라기 총재 후임으로 프랑스와 독일 중앙은행 총재가 유력시되는데, 후임자를 위해 퇴임 이전에 금리인상 숙제를 마무리하려할 가능성이 있다.
BOJ 역시 10월 소비세 인상을 앞두고 있어 양적완화를 지속해야 하나 마이너스 장기화로 인한 금융기관 건전성 문제, 국채시장 유동성 문제가 크다.
게다가 최근 미국의 므누신 재무장관은 "향후 통상협정에서 환율조항을 논의할 것이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나 중앙은행이 자국 수출 확대 등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공식 협정문에 담겠다"고 발언했다.
일본은행의 양적완화까지 문제를 삼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만약 채권시장이 실물경제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여 경기가 침체국면까지 흐르게 될 경우 주식시장은 어디까지 하락할 것인가.
정확히 재단하긴 어렵지만 과거 밸류에이션 데이터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2003년 IT 버블 붕괴 이후 발생한 경기침체기에는 KOSPI가 12개월 trailing PBR 기준으로 0.69배까지 하락했다.
2008년 리만 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 금융위기 당시 저점은 0.81배였다.
2011년 유럽 재정위기 당시는 1.02배, 2016년 국제유가 하락 및 신흥국 경제위기 시기엔 0.93배까지 빠졌다.
2011년은 유럽의 위기였고, 우리나라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간접적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번 미중 무역분쟁이 위안화 약세와 중국 금융위기로 확산된다면, 우리 경제의 중국 의존도를 감안할 때 2003년과 2008년 수준까지 하락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KOSPI가 2008년 밸류에이션 수준까지 하락한다면 1,800선, 2003년 저점 수준까지 하락한다면 1,530선이 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직 금융 부문의 균열 조짐은 없다.
중국 경기둔화와 이탈리아 예산안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CDS 프리미엄은 과거보다 크게 낮다.
예전 같았으면 1,200~1,300원까지 상승했을 원/달러 환율도 이번에는 1,150원을 쉽사리 넘기지 못하고 있다.
만약 시진핑 주석이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더 이상 경기침체를 좌시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한 보 물러난다면 무역전쟁은 휴전에 돌입할 가능성도 있다.
중간선거도 마무리된 마당에 트럼프도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국제유가가 25달러까지 하락하고 브라질, 중국 등 신흥국 경제위기가 확산되었던 2016년 초반과 비슷한 수준의 경기침체를 가정한다.
경기침체 우려가 금융위험으로 전이되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이 경우 KOSPI 2,000선 전후가 의미있는 저점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준의 정책 판단이다.
얼마 전 파월 의장은 미국 기준금리가 중립금리에 도달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발언해 채권시장 패닉을 야기했다.
중립금리 수준을 얼마로 볼 것인가는 FOMC 위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2.8~3.0%가 일반적인 견해다.
2019년 6월까지 금리를 올리면 중립금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때문에 2019년 2분기가 자산시장의 중요 변곡점이다.
미중 무역분쟁이라는 외부 악재에도 불구하고 금리 상승과 달러 강세가 지속되며 주식시장을 괴롭혔던 것이 2018년이었다.
그러나 만약 2019년에 무역분쟁 후유증, 모기지 시장 위축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통화긴축에 쉼표가 찍히게 되면 자본시장은 매우 탄력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공교롭게도 3대 중앙은행의 자산 증가율 역시 2019년 3월 전후 바닥을 치고 안정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사 채권팀은 한국은행도 경기여건 악화로 2019년 추가 금리인상을 단행키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이 휴전 상태에 돌입한다 해도 총수요나 물동량이 증가하는 시나리오는 기대하기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견제가 11월 중간선거를 겨냥한 단순 선거 전략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버티기 어려운 국면까지 왔기 때문에 제2의 플라자 합의가 나올 수도 있다.
경제 구조도 수출과 투자에서 내수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플라자 합의 후 일본의 버블이 어떻게 발생했고 어떻게 붕괴되었는지, 그 이후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일본과 같은 버블 붕괴가 중국에서 재현되면 공산당 중심의 정치 체제가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은 1) 의외로 과열 방지에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높고, 2) 위안화 강세 용인 등 내수 중심 성장 경로는 더욱 분명해지겠으나, 3) 산업 구조조정이 지속되며 총수요는 정체될 수 있다.
중국의 전면적인 경기부양 시나리오에 무게를 두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