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새로운 물가의 시대, 그리고 금융안정
최근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두는 단연 인플레이션이다.
GDP 성장률이 좋든, 고용지표가 서프라이즈가 나오든 모든 채권시장의 화제와 쟁점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드리는 그 한마디가 바로 인플레이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관심과 이목은 집중되는데 딱히 낮은 물가를 명확하게 설명하거나 평가할 만한 근거 역시 마땅하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언젠가는 찾아올 손님이라고 여겨졌던 존재가 제대로 등장조차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물가가 뛰긴 뛰는 것일까?
중앙은행들도 급해졌다.
물가를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 물가 상승, 즉 인플레이션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은 그만큼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입장에서는 혼란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채권시장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중앙은행들의 물가 문제에 대한 진단이나 평가에 무작정 따를 수도, 반대로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채권시장이 더 급할 수도 있다.
당장 채권 가격에 대한 프라이싱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 만큼 지난 수년간 이뤄졌던 수익률곡선 플래트닝과 절대적인 금리 수준의 하락이란 현실을 접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저물가에 대한 진단은 매우 더디고 명확하지도 않아 보인다.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채권시장 참가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왔던 ‘결코 연준에 맞서지 마라(Don’t fight the Fed)’라는 문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고 중앙은행들이 마냥 뒷짐만 지고 상황을 방관할 수 없다.
끊임없이 팽창을 원하고,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지닌 시장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감독자로서의 중앙은행의 역할 자체를 무시할 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처럼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을 목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거나 통화긴축에 나설 유인은 크게 약화된 반면 오히려 금융안정 문제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필요성은 점증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문제는 금융안정이란 목적이 아직 물가와 같이 구체적으로 정립된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그 목표가 보다 분명해지기 전까지 중앙은행과 시장과의 날카로운 신경전은 불가피할 것이다.
본 보고서는 이처럼 채권시장과 중앙은행 간의 공통의 관심사였던 인플레이션이 현재 어떤 구조적인 변화 환경에 직면해 있는지 논하고자 한다.
또한 물가안정과 더불어 중앙은행들의 정책 목표로 부각되고 있는 금융안정에 대해서도 동시에 분석하고자 한다
물가는 낮고, 금리를 올리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저물가 상황이 경제, 사회적인 구조적인 변화를 동반한 것으로 단순히 순환 사이클 상의 동향은 아닐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경기가 더 개선되거나 설사 활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물가가 과거와 같이 가파르게 상승하거나 중앙은행들이 적극적으로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는 아니란 의미다.
구조적인 저물가의 원인이나 장기적인 물가 경로에 대한 예상은 필자와 같은 시장 분석가가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거대 담론이다.
하지만 적어도 중장기적(3~5년 전후) 시각에서 우리는 그간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구조적인 요인들로 인해 저물가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저물가 상황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대응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아직도 물가안정을 상승 압력을 제어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물가를 끌어올린다는 의미의 물가안정에
대해서는 논란의 상당한 국면에서 중앙은행들의 대응은 일단 현상을 예의주시하는데 그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반면 금융안정은 물가안정 만큼이나 중앙은행들이 통화긴축이라는 칼을 꺼내들기가 마땅치 않다.
물가처럼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것도 아니고 중앙은행이 단독으로 대응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문제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금융안정이란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중앙은행들이 신경을 써야 할 영역들은 넓어지고 있으나 막상 이를 대응하기 위한 수단은 매우 한정적이다.
이래저래 금리를 적극적으로 올리기는 쉽지 않는 상황들은 상당 기간에 걸쳐 불가피해 보인다.
(한편 본 자료에서 물가안정, 금융안정 등의 정의와 관련된 내용은 한국은행이 발간한 ‘한국의 통화정책(2017년)’을 주로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물가안정의 정의
물가와 중앙은행.
마치 오래된 소설이나 영화에서 항상 단골하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처럼 물가와 중앙은행은 세트였다.
비록 악당으로 묘사되는 물가가 뛰는 것을 막기 위해 주인공인 중앙은행이 팔을 걷고 나서는 외견이나, 물가 상승이 없다면 중앙은행도 굳이 존재의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처럼 친밀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물가안정은 그 정의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칫 난해할 수 있는 정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상당수 중앙은행들은 정량적으로 물가목표 2%를 채택하
고 있는데, 최근 저물가 상황이 이어짐에 따라 오히려 물가목표로 인해 본질 자체가 흐려진 느낌까지 든다.
본 장에서는 이처럼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은 물가 혹은 물가안정에 대해 ‘한국의 통화정책 (한국은행, 2017년)’에서의 내용을 근간으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한국의 통화정책에서 정의하는 물가안정(price stability)은 정성적, 정량적 방식으로 나뉜다.
이중에서 먼저 우리는 과거 연준 의장들이 발언을 통해 인용한 몇가지 정성적 정의들을 살펴보자.
우선 볼커(1983) 전 연준 의장은 물가안정을 “전반적인 물가수준이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경제주체의 금융·경제활동 행태에 오랫동안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후 후임인 그린스펀(2001)은 “인플레이션의 수준 및 변동성이 낮아 가계 및 기업이 경제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라고 정의했고, 현재 연준 의장인 파월의 전임인 옐런(2017)은 “인플레이션이 경제적 의사결정에 중요한 변수로 포함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낮고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규정했다.
중앙은행 수장들의 이와 같은 정성적 물가안정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필자는 중앙은행은 물가가 경제 주체들의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 자체가 가능한 제한적이어야 함을 덕목으로 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는 동시에 물가가 가능한 상승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고, 자칫 물가가 상승함으로써 경제 주체들의 의사 결정에 왜곡을 발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성적 물가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중앙은행들은 물가안정을 어떻게 정량적으로 정의하고 있을까?
정량적으로 정의된 물가안정은 경제성장률 추세, 균형 실업률 수준, 적정 인플레이션 등 개별 국가의 경제여건에 따라 상이한 수준으로 정해질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물가안정을 ‘소비자물가 상승률 기준 연 2%를 하회하는 상태’로 정의했다.
여타 국가의 중앙은행에서는 정량적 차원에서 물가안정을 정의하지는 않았으나 대외에 공표한 물가안정목표로부터 물가안정에 대한 정의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은행의 현재 물가안정목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동기대비) 기준 2%이며, 미국의 연준은 물가안정과 최대고용 목표에 가장 부합하는 인플레이션 수준이 2%라고 공표해 왔다.
일본은행은 2012년 2월 물가안정목표를 도입하면서 그 수준을 1%로 설정했다가 이후 2013년 1월에 2%로 상향했다.
한편 남미 등 신흥국의 물가안정목표는 3% 내외로 선진국보다 높다.
상방 압력를 제어하는데 집중했던 물가안정,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정성적, 정량적으로 이뤄진 물가안정에 대한 정의가 중앙은행들의 행동 편향(bias)의 여지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다름아닌 물가안정은 상승하는 물가를 목표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의미하는 이른바 ‘상방 압력’을 제어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별로 중앙은행이 설립된 배경이나 목적은 다소 상이하지만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은 물가안정으로 대표되는 성장이나 확장의 반대 개념을 근간으로 한다.
당연히 물가가 크게 상승하는 것을 막고 그 결과로 통화가치의 안정도 꾀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최근 채권시장에서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혹은 물가안정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의미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물가가 상승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물가 자체가 상승하지 않고 있는 만큼 이제 과거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시각들이 점차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물가가 상승하는 압력을 제어한다는 것이 아닌 물가안정이란 과연 무슨 의미일까?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 한 가지 역사적 사례를 들도록 하겠다.
지난 2014년 포르투갈의 신트라에 서 열린 ECB의 포럼. 당시 유로존은 저물가 상황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에 이어 소위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고 불리던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까지 겹치며 좀처럼 반등을 보이지 못했다.
저물가 문제에 대해 중앙은행의 해법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물가목표제나 물가안정이라고 하면 물가가 뛰는 것을 막는데 초점이 맞춰졌을 뿐 떨어지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앙은행 차원에서 혹은 정책 당국 차원에서 물가 하락을 염려하는 곳은 일본은행(BOJ) 정도가 유일했고 이 역시 매우 예외적인 사안으로 비춰졌다.
이처럼 낮은 물가는 중앙은행의 입장에서는 딱히 대응을 하기도 방치하기도 쉽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러나 2014년 신트라에서 ECB는 이와 같은 중앙은행의 고민에 대해 종전과는 전혀 다른 접근과 대응 방안을 내놓는다.
당시 드라기 총재는 저물가의 원인을 크게 3가지(유가 등 글로벌 공통 요인, 유로존 재정위기에 따른 지역 요인 그리고 심리 요인) 등으로 분류했다.
특히 드라기가 저물가의 원인으로 지목했던 ‘심리’ 요인은 그때까지 각종 물가 관련 지표들의 보조 수단 정도로 인식됐던 기대 인플레이션과 관련 지표를 본격적인 논의의 쟁점으로 끌어올렸고, 이후 중앙은행 차원에서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의 제고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동시에 그 이전까지는 상승하는 것을 막는 물가목표제에 대한 운용을 오히려 낮은 물가를 끌어 올려 목표에 맞추겠다는 쪽으로 180도 선회한 접근을 선언한 것이다.
드라기의 발언과 이후 ECB가 보여준 행보는 다른 중앙은행이나 정책 당국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국도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이른바 디플레이션 논쟁을 제기하며 물가 하락이 미덕이 아닌 우려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필자는 그 이론적인 배경을 드라기 총재의 발언이 제공했다는 입장이다.
이후 국내 통화당국은 기준금리를 1%대까지 인하하며 적극적인 통화 완화에 나섰다.
그로부터 5년이 경과한 지금.
글로벌 금융시장은 다시금 그 부각되고 있는 저물가 상황에 대한 진위 파악 과정과 논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미 물가안정의 정의에서 답이 나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물가안정이 과거 물가가 상승하는 압력을 제어하는 방식에서 차츰 낮은 물가를 일정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상황까지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처럼 물가 문제에 대한 외연 확장은 단순히 물가가 지난 수년간에 걸쳐 낮게 나왔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물가안정에 대한 정의를 규정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답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앞서 우리는 중앙은행들의 물가안정에 대한 정량적 정의에서 상당수 중앙은행들이 물가목표를 2%(남미 등 신흥국은 3% 내외)로 제시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물가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물가 목표로 제시한 수치가 0%가 아니라 양(+)의 인플레이션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목표를 양의 값으로 설정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디플레이션(디플레이션은 물가수준이 하락한다는 점에서 물가상승률이 양(+)의 영역에서 하락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과 구별됨)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일본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디플레이션은 통상적으로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를 동반할 뿐만 아니라 지속성이 강하다.
단기간에 걸쳐 개선이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이를 흔히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0%로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을 허용함으로써 디플레이션 발생 확률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이 피하고 싶은 상황들의 순위를 정할 경우 디플레이션이 가장 선순위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처럼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을 피하고 물가안정목표를 적절한 수준의 (+) 값으로 제시하는 과정을 중앙은행 차원의 건전한 기대 인플레이션 경로 확보라고 평가한다.
즉 가계나 기업과 같은 경제 주체들이 향후 가격이 적정하게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를 형성함으로써 소비나 투자 활동을 원활하게 유지하고 나아가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아울러 이론적 논의에 더해 현실에서 물가는 상향 편의(upward bias)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의 목표를 물가가 상승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즉 물가가 상승한다는 가정에서 상승 압력이 우세하든지 혹은 하락 압력이 우세하든지 적정 수준이라고 추정된 목표(대부분 2% 내외)를 달성하지 못하는 그 자체를, 물가안정이 훼손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간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을 주로 상승 압력을 제어하는 방식에 집중했던 이유 역시 그만큼 실제 물가가 목표치를 상회하는 경우가 빈번해서 익숙해진 것일 뿐 반대로 낮은 물가로 하락 압력을 제어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면 좀 더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물가안정을 종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한다는 인식이 학계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고 있으며 심지어 통화당국자들 역시 이를 공론화하려는 추세다.
실제 얼마 전 조동철 금통위원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제 우리도 장기간에 걸쳐 목표수준을 큰 폭으로 하회하는, 지나치게 낮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해야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
디플레이션은 통상적으로 재화나 서비스 전반의 물가수준이 하락세를 나타낸 이후 자기실현적 기대(self-fulfilling prophecy)를 통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디플레이션은 보통 한번 시작되면 장기간 지속되는 경향이 있는 데다 경기침체와 금융불안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큰 경제적 비용을 유발할 수 있어, 인플레이션보다 더욱 정책 당국자들이 꺼려하는 이슈다.
일단 디플레이션 상황이 발생하면 물가가 추가로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경제주체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가계는 (가격이 향후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소비를 미루고, 기업도 (소비가 줄 것이기 때문에) 투자를 줄이는 등 총수요가 둔화된다.
한편 명목임금의 경우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더라도 화폐환상(money illusion)으로 인해 하방경직성을 가지게 됨에 따라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실업률이 상승한다.
이와 같이 디플레이션은 수요 둔화와 실업증가를 통해 실제 물가의 하락 압력을 높인다.
다시 말해 물가가 하락할 것이란 예상이 경제주체의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고 실업을 증가시켜 실제 물가하락을 유도한다.
이처럼 물가하락이 경기둔화를 유발하고, 경기둔화가 다시 물가하락을 초래하는 일종의 악순환(deflation spiral)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경기침체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디플레이션은 담보의 가치를 낮추고 명목금액으로 표시된 채무의 실질가치를 높여 가계, 기업 등 채무를 진 경제주체의 상환부담을 높인다.
이는 경제주체의 원리금 상환 지연, 금융기관의 수익성 악화 등을 초래하여 추후 금융불안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인다.
물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나
우리는 물가여건의 변화,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가안정의 의미나 정의 자체가 바뀔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다면 실제 금융위기 이후 지난 수년간 물가 환경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까?
본 장은 그간 물가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던 소위 인플레이션 경계론자들의 입장에서 진행됐던 임금과 물가에 대한 논쟁과 이에 대한 통화당국 차원의 진단을 통해 현재의 저물가 상황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인플레이션 경계론자들에게 입장에서 임금상승은 물가 상승(인플레이션) 과정에 도달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였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금융위기 해결 과정에서 중앙은행들의 공격적인 통화완화를 통해 시중에 돈이 대거 풀렸고, 그 유동성이 다양한 자산시장으로 분산되면서 가격변수를 자극하면 결국에는 물가도 상승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양적완화(QE) 등의 중앙은행 차원의 돈풀기에도 물가가 우려했던 수준으로 상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물가가 상승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몸값 즉, 임금상승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간 임금이 상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가가 상승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일종의 가설을 수립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국 지난해 미국에서 임금상승이 확인됐다.
2018년 연초 채권시장에서 나타났던 금리 급등에서의 하이라이트는 1월 고용이다.
더구나 당시 주목을 받았던 고용지표는 실업률, 비농업 부문신규고용이 아닌 시간당 임금상승률이었는데, 3%(전년대비 2.8%)에 근접하는 임금상승률은 드디어 인플레이션 위험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의미로 비춰졌다.
가뜩이나 유가 상승으로 기대 인플레이션은 높던 상황이라 인플레이션 경계론자들의 기세 역시 등등해졌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시간당 임금상승률은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했고, 올해 초에도 꾸준히 임금상승률은 3%를 웃돌았다.
반면 그토록 임금이 상승하면 물가도 뛸 것이라는 인플레이션 경계론자들의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가 지표는 여전히 안정적인 동향을 유지하고 있다.
파월 의장의 임금과 물가에 대한 발언은 이와 같은 물가환경 변화에 대한 중앙은행 차원의 진단에 쐐기를 박았다.
지난 1월 전미경제학회에서 파월 의장은 향후 통화정책에 대해 인내심을 가질 것이라고 밝힌 동시에 그 제반 여건으로 지목한 물가 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는 “시간당 평균임금이 상승했는데, 이는 매우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임금상승이 너무 높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Average hourly earnings moved up and that’s quite welcome and also for me at this time does not raise concerns about toohigh inflation)이라고 진단했다.
단순히 물가가 자신들의 목표치를 벗어날 여지가 크지 않다고 밝힌 것과 동시에 그간 물가 상승을 우려했던 이른바 인플레이션 경계론자들이 마지막 보루(寶樓)로 간주했던 임금상승과 무관하게 물가는 안정적일 수 있다는 것을 연준 의장이 직접 언급했다.
안정적인 물가 여건에 대한 파월 의장의 진단은 비단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파월 의장의 발언이 나오기 얼마 전인 올해 초 우리 나라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저유가 등의 영향으로 물가가 예상보다 더 떨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평소 역대 어떤 총재에 비해 물가안정에 대한 인식이 강해 매파적 성향의 인물로 분류되는 이주열 총재의 발언은 그만큼 물가에 대해 과거의 방식으로 예측하기가 쉽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필자에게는 비춰졌다.
현재 한국은행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은 1.1%로 이미 물가목표치 2.0%를 크게 하회하고 있다.
사실상 물가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수준까지 물가가 낮아졌는데, 한국은행은 실제 올 들어 2차례(1월, 4월) 수정 경제전망에서 2번 모두 물가 전망치를 하향했다.
특히나 올해 성장률 전망이 제한적인 하향에 그치고 있는 것과는 분명히 대조적인 행보인 동시에 사실상 물가를 진단하거나 예상하는 잣대가 달라져야 한다는 상황을 인정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구조적 물가 환경의 변화를 인정해야 하고, 실제 인정하는 중앙은행들
우리는 이처럼 글로벌 중앙은행 차원의 물가 판단이나 인식이 단순히 1회성으로 이뤄지는 진단이 아닌 상당한 기간에 걸친 구조적인 물가 환경의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파월 의장이나 이주열 총재의 물가 진단이 올해나 내년에 물가가 어느 정도일 지에 대해 예측하는 정도가 아닌 그간 중앙은행들이 예상해 온 물가 상황이 향후에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일종의 자기고백 성격이 강하다는 의미다.
실제 최근 각국 중앙은행들의 물가에 대한 예상은 대부분 앞선 전망치들을 하향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는 단순히 예상했던 수준으로 지표가 나오지 않았다는 예측 오차의 문제 외에도 종전 방식대로 계속해서 물가를 예측할 경우 수치 자체가 과대하게 집계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들게 한다.
더구나 해당 물가 수치들은 거의 목표치(2%)를 벗어나지 않았다.
물가에 대한 중앙은행의 관심은 다른 어떤 누구보다 각별하다.
사실상 본인들의 존재 이유가 물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동향을 파악하는 과정은 물론 전망 역시도 다른 누구보다 치밀하고 꼼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각별한 관심과 타이트한 분석에도 집계되는 물가 수준은 중앙은행들의 예상을 지속적으로 하회해 왔다.
더구나 이 같은 상황은 특정한 중앙은행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수 중앙은행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임을 감안할 때 현재 각국 중앙은행들의 물가 예측은 구조적인 여건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중앙은행들의 지난 수년간 반복해온 물가에 대한 예측이 추후 하향 편향식으로 수정됐다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했으나, 당장 이를 계량적인 기법이나 모델로 반영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됨에 따라 이와 같은 자기고백을 늘리고 있다고 해석한다.
쉽게 말해 ‘자신들 역시도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은 인정하나, 당장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만큼 그 고민 과정을 경제 주체들에게 솔직하게 알리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저물가의 원인들 1) 중국 효과 2) 인구고령화 3) 정보 비대칭성 해소
그렇다면 중앙은행들 조차도 자신들의 물가 전망에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물가 환경의 구조적인 변화들이나 그 변화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사실 이에 대한 의문은 필자와 같이 금융시장의 상황을 예측하고 대응 전략을 제시하는 분석가의 입장에서 언급할 수 있는 범주를 크게 넘어선다.
향후 보다 전문적이고 다양한 리서치가 가능한 연구자들의 분석을 기대한다.
다만 필자는 지금까지 각종 연구에서 일종의 가설 차원에서 언급됐던 내용들 중에서 크게 공감되는 부분들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글로벌 경제 질서 편입이다.
중국을 낮은 물가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주장들은 실제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소위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중국이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저가의 공산품을 수출하며 글로벌하게 물가 안정을 가져왔다는 시각인데, 필자 역시 매우 동의하는 내용이다.
둘째, 인구구조의 변화와 동시에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다.
과거 구미 선진국이나 일본 등의 문제로만 인식됐던 고령인구의 증가는 이제 우리 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사회경제적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령인구의 증가는 경제 전체의 총수요 압력이 과거와 달리 크게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채권시장에서도 고령인구의 증가에 따른 연기금들의 채권 수요 증가로 금리가 크게 하락했다는 진단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인구구조나 고령화는 저물가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는 견해다.
셋째,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정보 비대칭성 문제가 크게 해소됐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미시적 관점에서의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시장 내에서 발생하는 정보 접근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교란 요인이란 접근이다.
과거 가격정보에 대한 접근은 일부 가격결정자(price setter)에게만 주어졌고 이들이 가격을 결정하면서 순차적으로 가격수용자(price taker)들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가격정보들이 공유되면서 섣불리 가격을 인상할 경우 오히려 시장에서 역풍을 맞는다.
따라서 모든 시장 참가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가격 인상 요인이 아니라면 가격을 올리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제한된다는 시각이다.
필자는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가 물가 환경의 구조적인 변화 요인일 수 있다는 진단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가격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개선됨에 따라 가격결정자와 가격수용자들 간의 차이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동의한다.
금융안정의 정의와 등장
우리는 앞서 물가안정의 정의를 비롯해 최근 물가가 낮은 수준을 유지함에 따라 부각되고 있는 물가안정에 대한 성격 규정에 변화를 주려는 움직임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저물가의 원인과 중앙은행들의 물가 예측 과정에서의 어려움까지 살펴봤다.
본 장에서는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 만큼이나 중요한 목적으로 간주하는 금융안정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사실 금융안정은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과 관련된 법에서 법제화되거나 제도화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물가안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길지 않은 이슈나 쟁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여러 중앙은행들이 강조하는 금융안정에 대한 의지는 매우 확고할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명시된 시한 자체는 짧을 수 있겠으나, 중앙은행들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 강조해 온 행보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다.
금융안정은 다양한 금융과 관련한 구성부문(금융시장, 금융기관 등), 부문 간 상호연계성, 금융 현상의 복잡성 등으로 인해 단일화된 지표를 통해 정의하기 힘들다.
물가안정이 특정 수치의 목표를 기준으로 정의되는 것에 반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금융안정은 그간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됐다.
먼저 금융안정의 전제조건을 제시하여 이를 충족하는 경우를 금융안정이라고 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Orr(2006)는 금융안정의 전제조건으로 금융시스템내 제반 리스크가 적정하게 인지되고 분산되며 가격에 반영되어 관리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금융불안정(financial instability)을 유발하는 요인이 없는 상태를 금융안정으로 정의하는 방법이다.
Crockett(1997)은 금융안정을 금융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안정과 금융시장의 안정으로 구분하고 금융시장에서의 자산가격 변동이나 금융기관의 계약의무 이행 능력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잠재적 손상을 받는 상태를 금융불안정이라고 정의했다.
또 Ferguson(2002)은 자산가격이 경제의 기초여건과 크게 괴리되거나 시장기능 또는 신용가용성이 심하게 왜곡되고 이들 요인에 의해 경제의 총지출이 장기 추세치에서 벗어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금융불안정이라고 정의했고, IMF·FSB·BIS(2016) 등은 시스템 리스크를 금융안정의 핵심요소로 평가하고 금융안정을 시스템 리스크의 축적이 억제된 상태로 정의했다.
그밖에도 금융시스템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들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상태를 금융안정이라고 정의하거나 금융시스템이 대내외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강건성 또는 복원력에 초점을 맞추어 금융안정을 정의하기도 한다.
이처럼 금융안정은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한국은행은 1)개별 금융기관의 건전성 2)금융시장 및 금융거래의 안정성 3)가계·기업·금융기관·해외부문을 포함하는 개별 경제주체의 행위와 이들 간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거시건전성 4)금융기관과 금융시장을 규율하는 각종 제도의 정합성 등이 금융안정을 이루는 핵심 요소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들 금융안정 요소는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할 경우 전체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효과적인 금융안정의 달성을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
그렇다면 중앙은행들이 효과적인 금융안정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역할들은 무엇일까?
필자는 물가안정이 사실상 중앙은행이 단독으로 보유하고 있는 역할인 반면 금융안정의 그 복잡성으로 인해 다른 정책당국이나 기관들의 공조가 수반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중앙은행의 비교우위를 활용한 금융안정에 대한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금융시장을 모니터링하고 거시경제지표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탁월한 경쟁우위를 지니고 있다.
이를 활용하여 다른 감독당국이나 예금보험기구 등과의 정보 공유나 협력을 늘릴 수 있다.
둘째, 자산가격 변동에 대응한 통화정책이다.
이는 필자와 같은 시장 분석가들이 금융안정에 대한 중앙은행의 역할 가운데 가장 주목하는 사안이며, 이후 사례 분석에서도 모두 해당 내용들이 담겨 있다.
자산가격의 변동에 통화정책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와 관련한 논의를 정리하면 최근에서는 대체로 자산가격이 기초적인 경제 여건(펀더멘털)에서 괴리되었을 경우 통화정책적인 대응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자산가격이 펀더멘털과 괴리되면 향후 급격하게 조정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의 부실이 초래되는 동시에 소득과 물가가 목표수준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에서 통화당국은 자산 가격이 펀더멘털을 반영한 균형으로부터 괴리된 정도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자산가격이 미래 인플레이션과 산출량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도 자산가격의 변화를 감안한 통화 정책수행이 필요할 수 있다.
한편 정책금리의 변경은 여러 거시지표 및 경제주체에 무차별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자산가격변동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통화당국이 미시적 수단을 적절하게 활용돼야 한다.
이밖에도 최종대부자기능의 효율적 수행, 지급결제시스템의 안정 유지 노력 강화 등도 금융안정의 목적에 부합하는 중앙은행의 역할로 볼 수 있다.
사례로 보는 금융안정을 위한 중앙은행들의 대응
금융안정에 대한 복잡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앞서 언급된 내용들을 감안할 때 금융안정은 중앙은행들의 설립 목적에 이미 묵시적으로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다.
다시 말해 시기적으로는 금융위기 이후 명분화되긴 했으나 이미 상당수 중앙은행들이 해당 정의에 부합하는 행위나 조치들을 해 왔다는 의미다.
필자는 이처럼 금융안정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실제 통화 당국이 행했던 발언이나 행보를 통해 반향을 불러왔던 사례들을 들고자 한다.
첫째, 1996년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당시 주식시장의 상승에 대해 언급했던 이른바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 발언이다.
그린스펀의 발언으로 주가는 단기에 20%나 급락했고 이후 언론에서는 주식시장이 과열 징후를 보일 때마다 관용구처럼 해당 용어를 언급하곤 했다.
그린스펀 의장은 그 이전까지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보여줬던 은둔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시장과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둘째, 2005년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밝힌 금리를 올려 부동산 등 자산가격 급등의 부작용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통해 사실상 부동산이 통화정책의 대상들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했던 발언이다.
해당 발언은 추후에 한국은행이 부동산과 관련하여 입장을 내놓는 과정에서 항상 비교 대상이 됐다.
필자는 박승 총재의 발언은 추후 금융안정을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으로 명시적으로 밝히는 과정에서도 직간접적인 토대가 됐을 개연성이 높다고 평가한다.
셋째, 2014년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상원 은행위원회 증언을 통해 밝힌 레버리지론과 하이일드 채권에 대한 우려 표명이다.
당시 옐런 의장은 해당 시장에 자금이 몰려 과열이 우려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옐런 의장 발언 이후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주요 하이일드관련 채권 인덱스들은 단기간에 걸쳐 큰 폭의 조정을 나타냈고, 하이일드 채권과 함께 경고 대상으로 지목됐던 주식시장에서의 일부 섹터나 소형주 역시 동반 부진을 보였다.
넷째, 지난 2017년과 2018년 상당수 중앙은행 관계자들이 언급했던 암호자산들에 대한 입장과 관련 연구들이다.
당시 중앙은행들은 암호자산에 대해 화폐가 아니며 일종의 자산이라는 진단을 내렸고(본 고에서 암호자산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그 결과 가파른 가격 상승을 보였던 암호자산의 가격은 조정을 나타냈다.
우리는 이처럼 금융안정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견제와 강조가 단발성으로 그친 이슈가 아닐 뿐만 아니라 주식, 채권, 부동산, 암호자산 등 비교적 다양한 자산군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중앙은행이 통화신용정책을 통해 경제 전반에 골고루 돈이 돌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과정에서 특정 자산군이나 영역으로 자금이 집중될 경우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불안 요인을 차단하겠다는 행보 자체가 바로 금융안정이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그 고향으로 다시는 가진 못하리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에게는 태생적인 존재의 이유다.
다른 어떤 것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덕목인 만큼 한국을 비롯한 상당수 중앙은행들이 정량적인 목표 혹은 이에 상응하는 가이드라인을 정해 두고 물가 변화에 대응한다.
중앙은행의 물가 대응은 단순히 목표를 정해두고 있는데 그치지 않는다.
각종 연구나 조사를 통해 물가 동향과 구조적 변화를 점검하고, 정기적으로 물가 전망치나 물가와 관련한 보고서를 발
간하며 책임을 더한다.
그러나 최근 물가안정은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과거와 같이 물가가 상승하는 압력을 막는다는 의미에서의 안정이 아닌 자칫 인플레이션에 따른 건전한 기대 형성 경로도 작동하지 않을 만큼의 물가 상승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전통적인 물가 상승 압력을 견제하는 ‘스크루지’ 같은 중앙은행의 이미지가 이제는 ‘치어리더’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실제 지난 수년간 상승하는 물가 부담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거나 통화를 긴축한 중앙은행은 (환율 부담에 물가가 뛴 일부 이머징 국가를 제외하고) 거의 없었다.
그나마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기준금리를 일정한 사이클을 두고 올린 미국의 경우도 물가상승보다는 금융위기 이후 지나치게 낮아진 금리 수준을 정상화한다는 성격이 강했다.
물가가 낮아진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으나, 아직 명확한 실체는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이 매번 물가를 전망하고, 이후에 해당 전망치를 하향하는 방식으로 수정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그만큼 저물가에 대한 실체 규명에 있어서 중앙은행 역시도 몹시 난항을 겪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중앙은행의 입장에서 고개를 들기가 힘든 물가에 대한 예측력이다.
그렇다고 중앙은행들이 마냥 뒷짐만 지고 방관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팽창을 원하고,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감독자로서의 역할은 필요하다.
더구나 암호자산이나 IT의 발달로 다양해진 금융 수단들을 감안하면 중앙은행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물가안정이 아니라도 중앙은행이 할 일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재까지 중앙은행들이 내놓은 카드는 ‘금융안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금융안정이 아직 물가와 같이 구체적으로 정립된 목표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가처럼 시스템 내에서의 체계적인 관리가 아닌 수장의 발언 등과 같이 임시적인 대응이나 중앙은행 이외의 다른 정책 당국들과의 복합적인 공조가 불가피한 이유다.
이는 동시에 중앙은행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적극적으로 통화긴축에 나설 명분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기준금리 인상과 인하를 중립적인 관점에서 저울질해야 한다고 알려진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기조 설정이 처음부터 어느 한 쪽에 무게추가 기우는 모습이다.
또한 저물가의 비밀이나 물가에 대한 예측력이 높아지기 전까지 이와 같은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리포트 원문 link : http://hkconsensus.hankyung.com/apps.analysis/analysis.downpdf?report_idx=525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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